일본 전국시대;
시마즈의 큐슈정벌 이와야성 공방전
덴쇼 14년(1586년)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시마즈가 오오토모의 치쿠젠 이와야성(岩屋城)을 공략했습니다.
이와야성 조감도
덴쇼 13년(1585년)의 3월~4월에는 기슈(기슈정벌)를, 6월~7월에는 시코쿠(시고쿠평정)를 평정 해, 순조롭게 천하 통일에의 길을 걷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아직 큐슈에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 해의 오키타와테 전투(다테나와테 전투)의 류조지를 물리친 사츠마의 시마즈가가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덴쇼 14년(1586년) 7월 드디어 시마즈씨는 본격적으로 치쿠젠 공격에 착수합니다. 14일에는 치쿠젠의 이와야성에 공격이 개시됩니다. 이 때의 시마즈군은 이 앞의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진 류조지를 계승한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直茂), 아키즈키(秋月)가도 더해져 그 병력은 10만이라고도 해, 큐슈에서 역대 최대의 군세가 진군한 전투입니다.(물론 이 수는 어느정도 과장이 잇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
한편의 이와야성을 지키는 것은 오오토모 이와야성 성주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이 이끄는 760명 남짓이었다고 합니다. 오오토모는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미미가와 전투)에 패배한 이래 한때 무지카를 꿈꾸던 오오토모가의 기세는 없어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성의 군사들은 그야말로 결사의 각오로 싸웁니다. 하지만 이 병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싸우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소운은, 시마즈측의 항복 권유를 거절하고 이 적은 군사로 2주간이나 저항을 했습니다. 이윽고 덴쇼 14년(1586년) 7월 27일이 되어 더 이상의 농성이 불가능해지자, 쇼운은 남은 군사를 인솔해 옥쇄를 각오해 성의 밖으로 나옵니다.
流れての 末の世遠く 埋もれぬ
흘러가서는 세상 끝 멀리 묻히지 않고
名をや岩屋の 苔の下水
이름하여 바위굴 이끼의 아래의 물이구나
-다카하시 소운의 사세구
그리고 장렬한 사투의 끝에 쇼운과 군사는 전원 전사합니다. 이렇게 이와야성을 점령한 시마즈의 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그 기세로 쇼운의 아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있는 치쿠젠 다치바나성(立花城)에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어떻게든 다치바나성을 사수합니다. 오히려 무네시게는 다음 해, 천하 통일을 위해 큐슈에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힘을 빌려 치쿠젠 공격을 그만두고 분고 공격을 하고 있던시마즈를 격퇴해, 오오토모의 본거지 분고를 수비하러 갑니다.
그대로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간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됩니다. 오오토모는 소린의 아들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의 대에 실질적으로 멸망합니다만, 무네시게는 큐슈 정벌의 공적을 인정받아 오오토모에서 독립해 영주가 된다고 하는 대출세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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