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진실은 무엇? 다테 마사무네 부친 납치사건
덴쇼 13년(1585년),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를 납치해 도주한 하타케야마 요시쓰구(畠山義継)를 추격한 다테 마사무네가 요시쓰구와 함께 아버지를 총으로 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나이를 평정해 시고쿠로 진군할 무렵, 토호쿠(東北)는 아직도 군웅할거 상태였습니다. 요네자와성(米沢城)을 본거지로 하는 다테(伊達)가, 야마가타성(山形城)의 모가미(最上)가, 테라이케성(寺池城)의 카사이(葛西)가, 나메시성(名主城)의 오사키(大崎)가, 오다카성(小高城)의 소우마(相馬)가, 오다테성(大館城)의 이와키(岩城)가, 쿠로카와성(黒川城)의 아시나(芦名)가, 남쪽의 히타치(常陸)에게는 사타케(佐竹)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가족, 친척에 의한 복잡한 정략 결혼으로 연결되어 적대와 화목을 반복하면서 힘의 평형이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언제 누가 적이 될지 예측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영주들에게 둘러싸인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니혼마츠성(二本松城)의 하타케야마가, 코하마성(小浜城)의 오오우치(大内)가, 미하루성(三春城)의 타무라(田村)가, 스카가와성(須賀川城)의 니카이도(二階堂)가, 이시카와성(石川城)의 이시카와(石川)가 였지요.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
그런 가운데, 서서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다테가는 아시나가의 세력권과 마주보게 됩니다. 이 양세력에 끼워진 형태가 된 것이 코하마 성주 오오우치 사다쓰나(大内定綱)와 니혼마츠 성주의 하타케야마 요시쓰구였습니다. 그들이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그 세력범위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덴쇼 12년(1584년) 10월, 다테 마사무네는 아버지 테루무네에게 영주직을 양도 받습니다. 테루모토는 41세의 현역 무장이고 마사무네는 아직 18세의 젊은이라고 하는 어찌보면 부자연스러운 호주 승계는 마사무네의 어머니 요시히메(義姫)가 차남인 지쿠마루(竺丸:후의 코지로우)만을 귀여워해, 서서히 다테가 내에 '마사무네 대신 그 동생을 후계자로 하자'는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 일을 걱정한 아버지의 배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사무네의 그릇을 알아 보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 당주의 교대를 찬스라고 본 하타케야마 요시쓰구는 원래 아시나가에 가까웠던 자세를 한층 더 강조해, 다테에 협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던 오오우치 사다쓰나를 설득했습니다. 이것에 격노한 다테 테루무네는 조속히 오오우치 사다쓰나의 지성 오테모노리성(小手森城)을 공격해 성병부터 여자에 이르기까지 약 8백명을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오오우치 사다쓰나는 재빨리 성을 탈출해, 하타케야마 요시쓰구의 니혼마츠성으로 도망칩니다. 이것에 당황한 것이 요시쓰구입니다. 요시스구는 자신도 다테에 의해 패배할 것임을 직감하고 영지의 반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노한 테루무네가 낸 조건은 '5개의 마을을 남기고, 대부분의 영지의 몰수하며 후계자인 구니오마루(国王丸)를 인질로 보낸다.'라고 하는 요시쓰구에 있어서 불만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애써 웃으며, 덴쇼 13년(1585년) 10월 6일 다테와 하타케야마의 화목이 성립했습니다. 그 이틀 후 10월 8일의 일입니다. 당시 , 미야노모리성에 있던 테루무네에게 반란의 사죄와 화목의 감사를 하겠다며 요시쓰구가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30명 정도였지만 요시쓰구와 가로의 3명만이 성에 들어오고 나머지의 사람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테루무네와 가신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들을 성내로 불러 넣었습니다. 이윽고 회견도 끝나 요시쓰구가 돌아갈 때, 테루무네도 그 전송을 위해 밖으로 향합니다.
전송을 하는 테루무네의 모습
그 때, 요시쓰구의 가로 카노코다 이즈미(鹿子田和泉)가 요시쓰구에게 귓속말을 하자, 요시쓰구는 "뭐라고!"라 외치며 갑자기 테루무네의 멱살을 잡아, 가지고 있던 호신용 단도를 들이대며 "정말인가!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질질 끌고 데려가, 자신의 말에 실어 그대로 납치해 버렸습니다. 가신들도 주군에게 칼을 대고 있는 요시쓰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곁에 있던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과 다테 시게자네(伊達成実)는 곧바로 추격을 개시하는 것과 동시에, 이 날 코하마성 밖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있던 마사무네에게 이 일을 알립니다.
눈물을 머금고 공격을 지시하는 마사무네
테루무네을 납치해 거성 니혼마츠성으로 도망치는 하타케야마와 그를 쫓는 다테, 8 km 정도 간 뒤에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 하류 쪽에서 마사무네가 그들을 따라 잡자, 즉시 하타케야마세를 총포대로 둘러쌉니다. 하지만 강을 넘으면, 하타케야마의 영지입니다. 이에 마사무네는 어찌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상관없다! 나는 신경쓰지 말고 공격해라!" 라 테루무네가 몇번이나 외치자, 마음을 정해 지시를 내립니다. 맹렬한 총격음과 함께 하타케야마와 함께 아버지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버지 사후 일주일 뒤, 마사무네는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를 애도하는 전투를 벌이니 이것이 히토토리바시 전투(人取橋の合戦)입니다.
다테 테루무네의 죽음
그런데 많은 의문점이 생깁니다. 먼저 요시쓰구의 행동은 계획된 것일까요? 아니면 우발적인 것일까요? 또, 마사무네역시 의문점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총포대가 옛 주군 다테 테루무네에게 총을 쏘았을 때, 마사무네는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역 영주인 마사무네면 몰라도 가신들이 주군에게 총을 쏘았을까요? 이는 말도 안됩니다. 또한, 테루무네가 납치당했을 때 가신들은 당황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마사무네의 총포대, 심지어 기마대도 아닌 총포대가 먼저 도망친 요시쓰구를 따라잡은 것도 의심쩍습니다. 보통 마사무네가 매사냥 중이었으므로 총포대가 총을 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하나, 당시에 총으로 사냥감을 잡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번에 30명 정도를 전원 죽여버렸던 수의 총은 한 두 정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럼 어느정도의 총포대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겠지요.「마사무네기」에는 마사무네는 매사냥에는 가지 않고, 코하마성에서 요시쓰구를 토벌하기 위해 무기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이것을 감지한 요시쓰구의 가신이 그 일을 보고해, 앞의 납치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설명이 제일 납득이 가네요. 아마 부친에게는 비밀로 혼자서 요시쓰구 토벌을 준비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다테가는 영지를 확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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