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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이야에스, 시나다를 공격하다 우에다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이야에스, 시나다를 공격하다

우에다성 공방전



 덴쇼 13년(1585년) 8월 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우에다성(上田城)에 총공격을 시작 했습니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덴쇼 10년(1582년)의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할복 했을 때, 시나노 우에다성의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산하에 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호조와 우에노의 분할을 실시했을 때에, 결과적으로 마사유키가 자력으로 손에 넣었던 우에노의 영지를 빼았는 형태가 되어, 그 무렵부터 서서히 마사유키와 이에야스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덴쇼 13년(1585년) 7월에, 힘을 길러 온 이웃나라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마사유키는 차남의 벤마루(弁丸: 후의 유키무라)를 인질로 에치고에 보냅니다. 이 행동을 에치고로 가담한 배반 행위라고 본 이에야스는 마사유키의 토벌을 명령해 토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 시바타 야스타다(柴田康忠), 히라이와 치카요시(平岩親吉) 등과 이 지역을 잘 아는 다케다가의 옛 신하를 가세한 대군세를 파견합니다.


견고한 우에다성(上田城)


 덴쇼 13년(1585년) 8월 2일 도쿠가와군은 우에다성에 총공격에 시작 합니다. 그러나 농성하는 마사유키는 소부대에 의한 기습공격을 연발해 적을 혼란시키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우선 적의 대부분을 성벽근처까지 끌어 당겨 두고, 일제히 총을 쏩니다. 이에 적군이 당황해서 퇴각하려 하지만, 미로와 같이 되어 있는 성벽아래의 길에서는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우에다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무리라고 판단한 이에야스가 파견한 부대는 일단 철퇴하고 태세를 고쳐 세우기로 합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그들의 철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카미카와(神川)유역을 철퇴해 나가는 이에야스군을 쫓아 맹공격을 합니다.


 동시에 지성 토이시성(戸石城)에 있던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도 출진해 공격에 참가합니다. 타다요의 남동생으로, 이 때의 싸움에 참전하고 있던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彦左衛門)은 후에 그 저서 「미카와이야기(三河物語)」에서 이 날의 이에야스군의 패배가 심했던 것을 쓰고 있습니다. 이야에스측에서 쓴 책에서 이렇게 비참한 상태를 쓴다고 하는 일은, 이 때의 전투가 얼마나 대패였는지를 알려줍니다. 이에야스군은 이 날 1,300명이 전사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도 단념하지 않는 이에야스는 사나다를 잡으려고, 몇번이나 군사를 내 11월 무렵까지는 소규모 전투를 반복합니다. 여기서, 이에야스 측에 대사건이 일어납니다. '혼노지의 변'에 필적하는 전국 최대의 수수께끼라고 칭해지는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数正)의 실종(出奔)입니다.



갑작스레 사라진 가즈마사



 이시카와 가즈마사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인질의 몸이었지만 이마가와의 일원으로서 선봉에 선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음을 틈타 인질에서 탈출해 스루가의 이마가와에는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오카자키성에 들어가 독립합니다. 하지만 그의 부인과 아들을 이마가와에 남긴 채였습니다. 부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의 딸인 세나히메(瀬名姫: 후의 쯔키야마도노)였습니다. 정략결혼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사이가 좋은 부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남 타케치요도 되찾아야 하지요.


 이 때 니시고리성(西郡城)의 전투에서 생포한 이마가와의 인질과의 교환하려 목숨을 걸고 스루가로 가서 부인과 아이를 이에야스에게로 데려온 것이 바로 이시카와 가즈마사입니다. 이 일 뒤에 가즈마사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쓰의 후견인과 같은 입장이 됩니다. 하지만 후에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쯔키야마도노와 노부야쓰는 죽게 됩니다.(도쿠히메의 기구한 인생) 이 일로 인해 가즈마사 역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즈음 그는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여 갑자기 일족을 데리고 오카자키성을 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갑니다. 자신의 수족과도 같았던 가신의 배반에 충격받은 이야에스는 우에다성 공격을 중지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마사유키는 결과적으로 우에다성을 지켰습니다. 그는 15년 뒤의 게이쵸 5년(1600년)에도 아들 시나다 유키무라와 함께 이 우에다성에서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를 격퇴합니다. 시나다는 도쿠가와의 천적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