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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칸랴쿠 3년(1184년) 1월 16일, 오미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게 동국에서 대군이 파견되어 왔습니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호쿠리쿠를 공격하는 타이라 가문을 구리가타토우케 전투(구리가타토우케 전투)에서 대패시켜, 그대로 교토까지 들어갑니다.(키소노 요시나카 입경) 타이라 가문은 이미 교토에서 도망친 뒤였습니다.(타이라 가문, 수도를 빠져나가다)


요시나카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었지만, 키소 태생으로 교토의 관례를 모르고 무례한 행동을 한 요시나카를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는 은밀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부르고 요시나카에게 '타이라 추토의 선지'를 내립니다. 물론, '타이라 가문이 수도를 탈환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진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요시나카는 책략에는 능하지 않은 인물이여서, 수면 아래의 공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타이라 토벌을 위해 출발합니다.(미즈시마 전투) 여기서 패배한 키소노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거주하던 호주지덴을 방화하고 그를 내쫓아 버립니다.(고시라카와 법황을 내쫓다) 이에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리토모에게 '키소노 요시나카 토벌의 영지'를 내립니다.


 요시나카는 쇼군에 까지 올랐기 때문에(요시나카 쇼군에 오르다), 그를 토벌하려면 무엇보다도 준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는 곧바로 군의를 열고 대군의 파견을 결정합니다. 애초에 요리토모는 요시나카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엇습니다. 6만이나 되는 대군이기 때문에 하루이틀에 준비할 수는 없었겠지요. 칸랴쿠 3년(1184년) 1월 16일 요리토모의 동생인 노리요리(範頼)가 인솔하는 6만의 대군은 오미에서 대기하는 또 한사람의 남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합류합니다


 요시츠네는 소년 시대를 교토에서 보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교토의 지리를 꿰고 있었습니다. 적은 세타(瀬田)와 우지(宇治)의 두 다리를 파괴하고 방어하며 진을 칠 것이라고 예측한 요시츠네는 맞은편에 진을 친 뒤, 말로 도강해 적을 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수량이 늘어나 물결이 일고 있고, 폭포와 같이 흐름이 빠른 이 날의 우지가와를 앞에 두고 요시츠네는 거취를 고심합니다. 그런 그의 앞에 이제막 21세가 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가 등장합니다. 



강을 건넌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여기는 비와호의 하류입니다. 언제까지나 기다려봐야 물살이 얌전해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앞센 우지바시 전투(우지바시 전투) 때는 아시카가 마타타로 타다츠나(足利又太郎忠綱)는 불과 17세로 이 강을 건넜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지, 오니가 아닙니다. 제가 선진을 이끌고 적을 공격하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자신이 이끄는 500기의 군세를 정비하기 시작하는데, 그보다 앞서 두명이 강에 뒤어들었습니다. 한 명은 카지와라 카게스에(梶原景季), 그리고 또 다른 한사람은 사사키 타카츠나(佐々木高綱)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