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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지에이 2년(1183년) 윤 10월 1일, 서쪽 지방으로 도망친 타이라와 그 추토를 명령받은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싸운 미즈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미즈시마 전투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호쿠리쿠를 공격하는 타이라 가문을 구리가타토우케 전투(구리가타토우케 전투)에서 대패시켜, 그대로 교토까지 들어갑니다.(키소노 요시나카 입경) 타이라 가문은 이미 교토에서 도망친 뒤였습니다.(타이라 가문, 수도를 빠져나가다)


 타이라 가문이 빠져나갈 때는 히에이잔에 몸을 숨겨 요시나카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시라카와 법황이었지만, 키소 태생으로 교토의 관례를 모르고 무례한 행동을 한 요시나카를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는 은밀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부르고  요시나카에게 '타이라 추토의 선지'를 내립니다. 물론, '타이라 가문이 수도를 탈환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진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요시나카는 책략에는 능하지 않은 인물이여서, 수면 아래의 공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타이라 토벌을 위해 출발합니다.



미즈시마 전투



 이렇게 해서, 시코쿠의 야시마(屋島)에 거점을 두고, 교토 탈환을 노리는 타이라를 향해 요시나카는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때, 기나이에서는 기근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량의 병사를 위한 병량을 모으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시나카는 7,000의 군세중 3,000을 현지에 남기고, 자신은 교토로 귀환합니다. 지에이 2년(1183년) 윤 10월 1일 타이라군과 요시나카군이 맞붙은 미즈시마 전투가 전개됩니다. 이 날 야시마 공격을 위해 약 500척의 배에 분승해 미즈시마를 출격 한 요시나카군에게 약 1,000척을 자랑하는 타이라군이 쳐들어옵니다. 게다가 수운에 뛰어난 타이라군은 해전도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배들을 이어, 육전과 같은 전투 대형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판을 올려 배와 배를 종횡 무진 왕래할 수 있도록 해서,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화살을 쏘아 옵니다. 


 이에 요시나카군이 육지로 돌아오려고 배를 돌리, 타이라군은 바로 배나 바다에 익숙한 말을 꺼내 상륙한 뒤에 곧바로 전투에 들어갑니다. 격전이 전개되는 중, 이윽고 이 전투 즈음에 요시나카에서 대장을 맡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키요(源義清)와 운노 유키히로(海野幸広)가 전사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낮인데도 불구하고 근처가 어슴푸레해져 칠흙이 땅을 뒤덮게 됩니다. 금환 일식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시나카군은 갑자기 덥친 어둠에 우왕좌왕했습니다만, 타이라군은 당황하지 않고 적을 공격했습니다. 아마 큰 권세를 지니고 있었기에 음양사(陰陽寮)나 천문박사와 연줄이 있었기에, 이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패배 이후, 키소노 요시나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고시라카와 법황이 접촉한 것을 알고, 대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