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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5일, 타이라 가문이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받들어 교토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수도를 떠나는 코레모리



 호쿠리쿠 전투에서의 타이라 가문의 대패는, 교토에도 전해지고 있었습니다.(구라가타토우케 전투) 드디어 미나모토가 공격해 오는 것은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교토 내의 집들은 문뿐만 아니라, 창문도 닫고 안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고합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조속히 타이라 가문을 단념하고, 24일에 고쇼(御所)를 빠져 나가 히에이잔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교토에 올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타이라 가문은 부득이 법황의 동행을 포기하고, 겐레이 몬인 토쿠코(建礼門院徳子)[각주:1]에 안긴 6세의 안토쿠덴노를 데리고 교토에서 나옵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5일, 이른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앞선 요시나카와의 싸움때 타이라의 요청에 서쪽 지방의 무사들은 꽤 응답해 주고 있었으니까, '서쪽으로 가서 채비를 고쳐 세우면 어떻게든 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토쿠덴노를 따르는 공경(公卿)은 불과 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문신들은 법황과 함께 타이라를 단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교토를 빠져나가는 타이라 군은 영화를 자랑한 로쿠하라(六波羅)나 니시하치죠(西八条)는 물론, 하인의 숙소나 집도 불을 질러, 교토는 한순간에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행군하는 도중부터, 타이라 가문의 붉은 기를 버리고, 교토돌아가는 사람도 나옵니다.


 예전 천도했었던 추억의 땅 후쿠바라에 도착한 타이라 가문은  후쿠하라의 대궐에도 불을 지르고 모두 배를 타, 타이라 가문은 서해로 무사히 달아났습니다.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는 타이라 가문 중 유일하게 처자를 교토에 남긴 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타이라 가문 이야기(平家物語)」에 따르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코레모리는 '내가 죽어도, 비구니가 되지 말고, 누군가 좋은 사람을 찾아내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사시오.'라 말합니다. 그러나 부인은 '함께 들판의 이슬과도 같이 사라져, 하나도 아래로 떨어지지 말게 하세요.'라며 소매에 매달렷습니다. 또, 나가는 그에게 10세의 아들과 8세의 딸이 '어디에 가십니까?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하지만, 코레모리는 그들을 뿌리치고 교토에서 멀어졌습니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로 안토쿠덴노의 어머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