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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일본 전국시대; 어째서일까? 히라테 마사히데의 할복 일본 전국시대; 어째서일까? 히라테 마사히데의 할복 텐몬 22년(1553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 노부나가의 부자 2대를 시중든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가 할복 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주인공, 오다 노부나가는 텐몬 3년(1534년)에 태어납니다. 그 무렵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수호 시바(斯波)가를 시중드는 수호대의 오다 집안의 한 분파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다가 내의 내분을 이용해 오와리의 대부분을 손에 넣고 오히려 본가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갔습니다. 그런 노부히데의 후계인 노부나가의 모리야꾸(傅役・교육계)였던 것이, 노부히데의 가신중에서도 두번째로 꼽히는 히라테 마사히데입니다. 그는 옛 가곡에 통달하고 다도를 즐겨 풍류를 즐기는 문화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노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일본 전국시대;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텐몬 20년(1551년) 스오우의 전국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隆房)가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다이네이지(大寧寺)의 변으로 불리는 전투 입니다. 오오우치가는 백제의 임성태자(琳聖太子)의 자손입니다. 스오우의 '오오우치'를 본거지로 했기 때문에, 오오우치라고 자칭하게 됩니다. 메이토쿠 2년(1391년) 경에는 서쪽으로 세력을 늘려 대대로 오오우치가의 당주가 스오우의 수호를 맡게 됩니다. 제29대 당주인 오오우치 마사히로는 오닌의 난에서 활약하고, 제30대 당주인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관령 호소카와가의 싸움에 관여하는 등 중앙에서도 경의를 표해지는 가문이 되어 갔습니다. 교로쿠 원년(1528년)에, 그 요시오키에 이어 오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모리 모토나리의 도약, 킷카와, 코바카야 탈취 일본 전국시대;모리 모토나리의 도약, 킷카와, 코바카야 탈취 텐몬 19년(1550년) 모리 모토나리가 킷카와 부자를 살해했습니다. 관서의 대영웅 모리가도 모리 모토나리가 상속했을 무렵은 일개 고쿠진(반사 반농의 재야의 무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북쪽엔 아마고가, 서쪽엔 오오우치가, 남쪽에는 오오토모가의 사이에 낀 약소세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가가 엄청난 대국의 주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모토나리의 모략의 산물입니다. 모토나리는 뛰어난 장수라기 보다는 위대한 참모스타일 이었습니다. 치밀한 정보 활동에서 모략, 계략을 만들어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지요. 강대국에 둘러쌓인 약소국의 전략으로선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모토나리가 크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 것은 차남 모토하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다케다군의 뼈아픈 패배 토이시 괴멸 일본 전국시대;다케다군의 뼈아픈 패배 토이시 괴멸 텐몬 19년(1550년)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적대하고 있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의 거점 토이시성(戸石城)에 총공격을 실시했습니다. 시나노의 스와를 정복한 신겐은 시나노 동부도 그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텐몬 17년(1548년)에 그 근처 일대를 영지로 둔 카츠라오성의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에타바루의 전투 뒤에 중신 이타가키 노부가타나 아마리 토라야스를 잃는다고 하는 충격을 받아 시나노 동부 평정은 당분간 휴지됩니다. 이윽고 텐몬 19년(1550년) 신겐에게 패주 한 나가토키(長時)가, 그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의지한 뒤로, 신겐과 요시키요의 갈등이 다시 표면화합니다. 그해 8월 요시키요의 거점 성, 토이시성를 포위한 신겐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오토모 후계자 분쟁, 오오토모 2층의 참변 일본 전국시대;오오토모 후계자 분쟁, 오오토모 2층의 참변 텐몬19년(1550년) 분고(豊後)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가의 20대 당주 오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발발했으니, 이것이 '오오토모 2층의 참변(大友二階崩れの変)'입니다. 분고의 전국 다이묘인 오오토모가의 제20대 당주 오오토모 요시아키에게는 정실이 낳은 요시시게(義鎮)라는 21세 장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측실이 낳은 삼남 시오이치마루(塩市丸)을 후계자로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장남 요시시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신을 손으로 때리거나 검술의 연습인데도 상대를 무참히 치는등 천성이 난폭했다는 설, 요시시게가 병약했었기 때문에 당주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설, 요시시게의 어머니가 스오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안쇼우성 전투 일본 전국시대;안쇼우성 전투 텐몬 18년(1549년)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부하 타이겐 셋사이(太原雪斎)가 미카와 안쇼우성을 공격해 성주 오다 노부히로(織田信広)를 납치한 안쇼우성 전투가 있었습니다. 텐몬9년(1540년),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가 스루가의 이마가와가에 속하고 있던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가 지키는 안쇼우성을 빼앗고 나서 오와리와 미카와의 분쟁은 잠잠했습니다. 이때의 노부히데는, 또 하나의 이웃나라인 미노의 사이토도산과 전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텐몬 18년(1549년)하극상의 전국시대답게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참살된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의 주군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많이 당황하게 합니다. 이전부터 오다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남만신교의 전파 일본 전국시대;남만신교의 전파 텐몬 18년(1549년), 에스파니아의 그리스도교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왔습니다. 2년전의 1547년, 말레이 반도의 마락카에 체재하고 있던 자비에르에게, 안지로우라고 하는 일본인 청년이 찾아 왔습니다. 고향, 가고시마에서 살인을 범해 도망치고 있던 안지로우는 죄의 무게에 괴로워하다 자비에르에게 구제를 요구했지요. 자비에르의 한마디 한마디에 감명을 받아 치유된 안지로우였지만, 그이상으로 감명을 받은 것은 다름아닌 자비에르 였습니다. 안지로우가 이야기하는 고향 가고시마의 일, 일본인의 일을 들은 자비에르는 마음 먹고 일본에 선교할 결의를 합니다. 예수회 고스메 데 토레스 신부, 후안 페르난데스 수도사, 마누엘이라고 하는 중국인, 아마도르라고 하는 인도인,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승리일까 패배일까? 신겐과 우에타바루 전투 일본 전국시대;승리일까 패배일까? 신겐과 우에타바루 전투 텐몬 17년(1548년)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시나노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의 '우에타바루 전투'가 있었습니다. 시나노의 동부에 세력을 넓히는 다케다가, 그 세력은 카츠라오성(葛尾城)의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영지의 근처까지 다가갔습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당시 시나노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무장입니다.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면서, 간신히 텐몬 16년(1547년)에 사쿠군의 시가 성주 카사하라 키요시게를 격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겐은 드디어 오가타로 진공합니다. 드디어, 요시키요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신겐이 치는 곳이 요시키요의 동맹국들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겐의 기세가 커지면 그들 중에는 다케다로 등을 돌리는 세력..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신겐의 시가성 공략 일본 전국시대;신겐의 시가성 공략 텐몬 16년(1547년) 8월 17일, 다케다 신겐에게 공격받은 시나노 시가성(志賀城)의 카사하라 키요시게(笠原清繁)가 전사해 시가성이 함락 했습니다. 신겐이 시나노로 진공해 텐몬 11년(1542년) 스와를 시작으로, 이나다니(伊那谷)에 진출하는 한편으로, 사쿠 방면에도 쳐들어가, 텐몬 15 년(1547년) 우치야마성의 오오이 사다키요를 항복시킨 신겐은 텐몬 16년(1547년) 카사하라 키요시게(笠原清繁)이 지키는 시가성을 포위했습니다. 시가성은, 국경의 요세이시산(寄石山)의 능선에 쌓아 올린 산성이기 때문에, 단단한 성으로 그 성을 지키는 키요시게도 그 자연의 요충지에 둘러싸인 철벽의 성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지 신겐의 군세를 보아도 당황하지 않고 우에노 히라이성(平井..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쿠보 괴멸하다 카와코에 야전 일본 전국시대쿠보 괴멸하다 카와코에 야전 텐몬 15년(1546년) 전국시대 굴지의 야전 '카와코에야전'이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을 관리하기 위해 가마쿠라쿠보와 그 보좌로 관동 관령을 두었습니다. 가마쿠라쿠보는 아시카가가의 분가가 대대로 맡고 관령직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교대로 맡고 있었습니다. 막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쿠보 4대 아시카가 모치우지때에, 막부에 반발해 쿠보가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요, 이에 막부와 관령 우에스기가가 연합해 쿠보 모치우지를 배제했습니다(에이쿄의 난). 그 모치우지의 아이 아시카가 나리우지(足利成氏)가 쿠보직을 탈환하려고 관동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막부에 무허가로 마음대로 자칭한 것이 코가쿠보입니다. 거기에 막부가 당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