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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미카타가와라 전투(1) 혼다 타다카쯔의 분전, 히토코토자카 전투

일본 전국시대;

미카타가와라 전투(1) 

혼다 타다카쯔의 분전,  히토코토자카 전투




 겐키 3년(1572년) 도토미에 진출해 온 다케다 신겐과 그것을 맞아 싸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이에 미카타가와라 전투의 전초전인 히토코토자카 전투(一言坂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상경한 뒤 노부나가와 사아가 험악해진  요시아키가 가장 의지한 것은  전국 최강이라 구가된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었습니다. 결국 겐키 3년(1572년) 본거지 쯔즈지가사키관(躑躅ヶ崎)에서 출진한 신겐은 호조 우지마사의 원군 2,000을 포함한 약 2만 5,000의 대군세를 3개로 나누어 각각 다른 루트로 침공합니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가 인솔하는 5,000의 군세는 시나노의 이이다 방면에서 미카와로 남하해 오쿠미카와(奥三河)에 침공하고, 이에야스군을 미카와 동부로 끌어 당깁니다.


 아키야마 노부토모(秋山信友)가 인솔하는 3,000의 군세는 동 미노(기후)로 진군해, 노부나가를 견제합니다. 그리고, 신겐이 직접 인솔하는 본대가 스와를 거치고, 텐류우강을 따라 남하해, 도토미 국경에 있는 아오구즈레산(青崩山)을 넘었습니다. 거기서 한층 더 남쪽에 이미 다케다의 산하가 된 아마노 카게쯔라(天野景貫)는 이누이성(犬居城)에 들어가 여기서 군사를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후타마타오성(俣尾城)으로 향합니다.


다케다 신겐 상경 부분확대



 이에야스는 당연히 이 신겐의 침공을 단지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3,000남짓의 군사를 인솔하고, 스스로 하마마츠성을 출진합니다. 우선은, 정찰대가 미츠케 부근에서 다케다군과 부닥치지만,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한 도쿠가와군은, 퇴각을 시작합니다. 이 때, 군의 최후미를 맡아 분전한 것이, 도쿠가와 사천왕의 1명으로 꼽히는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쯔(本多平八郎忠勝)입니다.  


 그는 이에야스군의 불리를 깨달고 퇴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최전선의 병사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둠으로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타다카쯔는 급히 최전선으로 향해 가, 퇴각을 시키려 하나, 이미 다케다군에 따라 잡혀 히토코토자카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개시 되고 있었습니다. 양자의 거리는 불과 20 m, 필마단기로 뛰쳐나온 검은 감옷에, 녹각투구를 쓴 타다카쯔는 아군에게 퇴각을 시킴과 동시에 말머리를 돌려, 당당한 모습으로 적을 향해 창을 듭니다. 이 대담 무쌍하고 기백으로 가득 찬 타다카쯔의 행동에 다케다군은 아연해 일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 정찰대를 퇴각시킨 타다카쯔는 최후미를 지키며 철퇴를 개시합니다. 바싹 추격하는 다케다의 군사는 말머리를 돌려 베고, 다케다의 추격이 잦아들면 퇴각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이윽고, 텐류우강을 무사히 도하 해 어떻게든 다케다의 군사를 뿌리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혼다 타다카쯔



 전투를 끝내고, 이에야스의 앞에 나타난 타다카쯔, 사시모노(指物)는 너덜너덜에 뜯어지고 갑옷에는 5개의 화살이 박히고 얼굴은 새까맣게 더러워졌지만,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은 이야에스 측의 무장뿐만 아니라 신겐의 가신의 마음도 흔들었습니다. 이때의 혼다 타다카쯔의 나이는 약관 25세 였다고 하네요. 후에 신겐의 무사 코스기 사콘(小杉左近)은 이렇게 말합니다. 


家康に 過ぎたるものが 二つあり 唐の頭と 本多平八

이에야스에게는 과분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당(唐)투구이고, 다른 하나는 혼다 타다카쯔라는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