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기모쓰기가, 거짓전투로 멸망하다
에이로쿠4년(1561년) 12월 21일, 교전중이었던 시마즈(島津)가와 기모쓰기(肝付)가가 일단 화해가 성립했습니다.
당시 큐슈 상황
전국시대의 큐슈라고 말하면 오오우치, 오오토모 그리고 시마즈 3가의 '큐슈 삼국지'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삼국으로 갈라지기 전이고, 남큐슈에서는 사츠마(薩摩)의 시마즈가와 후유가(日向)의 이토가라고 하는 두 세력이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양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오스미(大隅)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기모쓰키가 였습니다.
기모쓰기 17대 당주는 기모쓰기 요시카네(肝付良兼), 시마즈의 당주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그리고 이토가의 당주는 이토 요시스게(伊東義佑)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세력 사이에 낀 기모쓰기가였는데, 이 요시카네 경우는 한층 더 까다로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요시카네의 아버지 기모쓰기 기네쓰구(肝付兼続)의 시대에는 이웃나라의 시마즈와 양호한 관계에 있어, 요시히사의 아버지인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 때는 오스미에 있어서의 간부가의 세력도 상당히 강한 때였습니다. 요시카네가 기모쓰기가를 이은 뒤, 양자의 관계가 미묘하게 됩니다.
기모쓰기의 외교관계
은거했지만 실권을 가진 기네쓰구가 스스로 시마즈와의 관계를 끝내고, 이토가와 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요시카네는 이토가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습니다. 즉 요시카네는 시마즈 요시히사의 숙부이지만, 이토가의 사위라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에이로쿠9년(1566년)에 아버지가 죽어, 명실 공히 당주가 된 요시카네었지만 미묘한 입장에 처해 양세력의 전투에서도 관망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 태도를 관철하자, 그를 의심한 시마즈가가 그 충성을 의심해 '이토가와 전투를 하라'고 재촉합니다. 곤란한 요시카네는 은밀히 이토가에 사자를 보내 전투를 하는 것 처럼 가장하자 합니다. 전투에는 무기, 탄약등의 물자의 조달이나 운반 등에 방대한 비용이 드는 것은 차치하고 엄청난 피가 흘러 많은 생명이 빼앗기는 것으로, 사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이라 해서 매일 전투를 반복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전투를 요구했지만..
이렇게 해서 시작된 기모쓰기 대 이토의 전투, 높은 사람들은 모두 연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 명색뿐인 사기의 증진을 하고 전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진을 친 뒤 관망의 자세를 취합니다. 하지만 이 거짓전투는 언제까지나 비밀 즉, 일선의 병사들은 이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열심히 전투를 하게 됩니다. 이에 이토에 피해를 입히자, 분노한 이토가는 군사를 모아 순식간에 기모쓰기를 토벌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 전투가 기모쓰기가의 명운을 갈랐습니다.
겐키2년(1571년) 제18대 당주가 된 요시카네의 남동생 기모쓰기 카네아키(肝付兼亮)는 2년 후에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유력 가신이 잇달아 시마즈가로 등을 돌립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본거지 코우야마성(高山城)도 시마즈에 점령되어 다이묘로서의 기모쓰기가는 멸망하고 시마즈의 가신으로 살게 됩니다. 재밌게도 시마즈의 가신으로서 중용 된 기모쓰기가는 에도시대에는 꽤 융성해,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는 명사 중 한명을 낳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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