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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인물편/영주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덴쇼 7년(1579년), 히젠의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모키를 예수회에 기탁했습니다. 


일러스트인데 심하게 미화되었네요



 비젠 시마바라의 전국 다이묘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의 차남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오오무라가의 양자가 된 것은 불과 4세 때였습니다. 당시, 시마바라 반도에는 몇개의 가문이 있었지만 그 세력이 커봐야 쿠니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가만은 시마바라 반도 일대에 자랑하는 세력을 가지는 영주였기에 여러 쿠니진들은 이 아리마가에 종속되는 형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텐몬 7년(1538년), 아리마가가 한층 더 세력 확대를 도모해 이웃나라의 오오무라가에 보낸 것이 스미타다입니다. 장래에 스미타다가 오오무라가의 당주가 되어 아리마의 세력을 늘릴려는 것이지요. 스미타다를 양자로 맞이한 오오무라 스미아키(大村純前)에게는 이 때 3세가 되는 친자식 타카아키라(貴明)가 있었기 때문에 약간 무리한 양자결연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스미타다에 우호적인 세력은 거의 없었지요.



 아무튼 텐몬 19년(1550년), 17세가 된 스미타다는 오오무라가를 이어 18대 당주가 됩니다. 하지만 주위는 적 투성이의 상황, 스미타다는 큰 압박을 느낍니다.  이 즈음 자비엘 이후로 선교사를 태운 포르투갈선들이 이웃나라의 마츠우라가가 영토로 하는 히라도항을 오갑니다. 스미타다는 그런 히라도의 상태를 보고 그 엄청난 이익을 눈치챕니다. 선교사가 일본에 오는 것은  포교만이 아니라, 무역도 한 목적이었지요. 마츠우라가는 무역으로 큰 돈을 벌고, 최신예의 무기를 수입해, 국력을 날이 다르게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스미타다는 당시  분고에 체재하고 있던 코스메 데 토레스 신부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자신의 영지의 요코제포(横瀬浦)를 개항하기 때문에, 여기에 오셔서 전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는 것이지요. 이즈음 때마침 히라도항에서 사소한 문제로 포르투갈 상인이 죽자, 포르투갈인들은 요코제포로 항로를 변경해 무역의 중심지가 됩니다. 에이로쿠6년(1563년)에는 스미타다 자신도 가신 25명과 함께 세례를 받아 돈 바르톨로메오의 이름을 받고, 일본 최초의 크리스찬 영주가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을 특별 대우 하고, 선교사의 포교 활동을 보장하며,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에게도 크리스트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오오무라령은 금새 일본에서 가장 큰 크리스트교 마을이 됩니다.


토레스 신부가 세운 십자가


 하지만 이는 토착 불교나 신토의 반발을 산데다가, 원래 주군의 아들인 타카아키라를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기에, 결국 에이로쿠7년(1564년) 그 세력이 봉기합니다. 게다가 류조지나 마츠우라도 타카아키라를 지지해 그들은 요코제포를 점령하고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여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요코제를 대신해 후쿠다포(福田浦)를 개항한 후, 2년 후의 에이로쿠 13년(1570년)에는 나가사키를 개항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가사키는 한가로운 어촌으로, 이 때 부터 엄청 발전해 나중에는 근대를 이끄는 도시가 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반란은 멈추지 않고 전쟁은 계속 됩니다.


나가사키에 정박하는 포르투갈 배


  덴쇼 7년(1579년) 스미타다는 나가사키, 모키를 예수회에 기탁해 그 항구들은 한층 더 발전을 이루어 갑니다. 덴쇼 10년(1582년)에는 일본 최초로 공식 유럽 방문 사절로 소년들을 파견하는 영주의 중에도 이름을 올리지요. 이 때, 사자의 대표 역할을 담당한 치지와(千々石) 미겔이, 스미타다의 조카입니다. 하지만 종래의 일본에 불순물이나 다름없는 크리스트교이기에, 결국 히데요시의 크리스찬 금지령으로 인해 험난한 길을 겪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미타다는 금지령이 내리기 1년 전에 병사합니다. 보통 전국시대의 크리스트교 영주하면 오오토모 소린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앞서 진정으로 크리스트교 마을을 만들어 낸 것은 스미타다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