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썸네일형 리스트형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 (2)요시쓰구의 에츠젠, 카가 설득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2)요시쓰구의 에츠젠, 카가 설득 게이쵸 5년(1600년) 7월 14일,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찬동 한 오오타니 요시쓰구가, 에츠젠 츠루가성(敦賀城)에 귀환해 호쿠리쿠의 다이묘들에게 권유를 시작했습니다. 7월 11일의 사와산성의 회견에서, 친구인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찬동 하는 일을 결의한 오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는 다음날,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도 더해, 향후의 방침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상세한 것들을 결정해 나갑니다. 우선,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나 나베시마 카쯔시게(鍋島勝茂) 등, 관서에 있어 아직 군세를 일으키지 않은 영주들에게 '아마 결전의 장소가 될 동쪽으로 향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1) 요시쓰구 설득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1) 요시쓰구 설득 게이쵸 5년(1600년) 7월 11일, 사와산성(佐和山城)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오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가 회견해 군사를 일으킬 결의를 했씁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관직 전까지의 생애는 수수께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오오토모가의 가신인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의 아들로 분고에 태어나 16세 때에, 하리마 평정 중에서 히메지성에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를 통해 관직에 올랐다고 하나, 연령적으로 모순이 있어, 최근의 연구에서는 시가현의 요고쵸(余呉町) 출신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전투를 동경하는 용감무쌍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용 이외에도 사무적인 재능이 있었고, 미쓰나리와 사이가 좋..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게이쵸 5년(1600년) 4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경 요청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거부했습니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뒤에, 그의 유언 대로 도쿠가와 이야에스를 비롯한 오대로와 이시다 미쓰나를 중심으로 하는 오봉행에 의한 합의제로, 정권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와 사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독단으로 마음에 드는 다이묘를 스스로의 파벌에 넣으려고 해서, 오대로와 오봉행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오대로의 나머지나 오봉행은 종종 연서(連署)를 써 이에야스의 행동을 비난 합니다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게이쵸 5년(1600년) 3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소 요시토시(宗義智)등이 조선에 강화를 요청해, 포로 160명을 송환했습니다. 아마쿠사 제도를 포함한 히고 4군의 영주 고니시유키나가, 나가사키 봉행인 데라자와 히로타카, 대마도 주 소 요시토시의 영지는 모두 조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의 처리의 주도를 그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야욕이 낳은 조선 침략은 두 차례에 걸쳐 실패하고, 결국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임진왜란 종결) 그 유언에 따라 철퇴하게 됩니다.그리고 일본 내의 정세가 급변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진 게이쵸 5년 중에 세키가하라전투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3) 천수각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3) 천수각 저번까지 해자와 벽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천수각에 대해서 살펴보려 합니다. 천수각은 일반적으로 '일본성'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지요. 천수각이란 일반적으로는 성에서 가장 큰 망루를 가르키는 말이지만,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천수각으로 부르는 건물이 천수각이 됩니다. 사실 이 단어는 메이지 이후에 사용된 것으로 별로 역사도 오래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천수각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천수각의 기원 천수각은 망루입니다. 망루의 역할은 쳐들어오는 적의 군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산성에서는 전망이 좋은 곳, 히라죠오에서는 가능한 한 높은 세이루우(井楼)를 만들어 더 넓은 전망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건축 기술이 향상..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2) 벽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2) 벽 전국시대의 성을 보호한 것은 해자(해자)와 벽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전국시대의 성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성벽 성을 둘러싸는 장벽이 바로 성벽입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무가 저택은 주위에 담을 세우고, 전장에서는 목책을 만들어 적을 금족 했습니다. 성벽의 재질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의 무가 저택은 널판지의 벽으로 저택을 방비했습니다. 이것을 '이타베(板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벽은 적의 파괴 공작이나 화살이나 철포, 화재에는 약했기 때문에 점차 공법이 변화되게 됩니다. 방탄을 위해 널판지를 겹치고 위에 지붕을 붙이고, 버팀목으로 기둥을 세웠습니다. 또, 이중의 판으로 담을 만들어, 판과 판 사이에 모래, 점토등을 넣는 '타이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1) 해자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1) 해자 저번 편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해자의 구조 성곽 방위의 기본이 되는 것이 해자입니다. 선사시대 부터 지면에 구멍을 길게 파 외부의 침입을 방해하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도 단순한 방어 방법이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굴착 기술도 향상해, 전국시대의 성곽에는 복잡하고 교묘한 해자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해자라고 하면 물을 가득 채운 수호(水濠)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성곽의 해자는 물이 없는 카라호리(空堀) 도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카라호리는 '적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중점으로 한 것으로 직접적인 낙사나 카라호리 안에서 꼼짝 못하는 적..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 예전부터 성곽은 마을이나 거기에 사는 사람, 재산, 주변의 경작지,항만 시설 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위 거점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인간이 정주 생활을 영위하게 된 죠몽 후기에서 야요이 시대에 취락 전체를 환호(環濠:구덩이)로 둘러싸 신분제의 발달과 함께 영주의 관을 보다 엄중하게 방어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다. 무가 사회의 성립기가 되고 나서는, 타 세력과의 항쟁을 중점으로 해 영주 저택은 한층 더 거대화, 요새화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 입니다. 당연히, 성을 만드는 장소는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 선택되어 그 풍토나 성주 마다 독자적인 개량을 더해져 건설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성의 입지에 관해서 주된 유형은 아래의 3 형식으로 분류됩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 삭발해 교토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한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에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 니시노마루(西ノ丸)에 들어 갔습니다. 게이쵸 3년 (1598년)의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이때까지, 오사카성의 니시노마루에 있던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는 삭발해 비구니가 되어, 교토 산본기의 저택으로 옮깁니다. 다음날의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에, 당시 거점으로 하고 있던 후시미성에서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려 이야에스가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에 도요토미를 멸하러 이동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후시미성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게이쵸 4년(1599년) 윤 3월 4일,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가의 가신 7명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습격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낳는 도요토미 가문 내의 분쟁은, 히데요시 만년의 무렵부터 그 징조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제일의 표적이 된 것은 다름아닌 이시다 미쓰나리였습니다. 그는, 원래 오미의 토호의 아들이었습니다. 덴쇼 2년(1574년), 아직 기노시타 도키치로라 자칭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주어진 오미의 영지를 순방하고 있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영지를 지나치게 열심히 보던 그는 지치고 목이 말라 차를 부탁하려고고, 문득 찾아낸 절에 들어갑니다. 차를 부탁한 히데요시에게 어린 승려가 나와, 차를 줍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단숨에 .. 더보기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52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