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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것이 '이치노타니 전투'입니다. 이 이치노타니 전투에서는 수많은 명장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 한 장면인 아오바의 피리, 미소년 아츠모리(敦盛)의 최후를 쓰려 합니다.


 아침 6 시경 시작된 이치노타니의 전투는 5시간정도로 종반에 접어들어, 차례차례로 타이라의 유명한 무장이 죽어 이미 승패는 눈에 보이고 있었습니다. 서쪽의 성곽에 제일 먼저 도착한 쿠마가이 지로우 나오자네(熊谷次郎直実)는 '이미 패배가 정해진 타이라군은 이렇게 되면, 이름 있는 무장이 바다에 도망치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해 하나 더 공을 세우려고, 해안으로 말을 끌고 나갔습니다. 해변에 가까스로 도착하자, 때마침 한 명의 무사가 물가에서 바다의 배로 뒤어드는 것을 보앗습니다. 



나오자네와 아츠모리



네리메키(練緯)에 학을 그려 넣고, 모에기오도시노 요로이(萌黄縅の鎧)[각주:1]를 입고, 쿠와카타(鍬形)를 쳐 갑옷의 끈을 매고, 고카네(金)로 만든 칼을 차 24개에 도달하는 키리후(切班)의 화살을 새겨, 시게도우(滋藤)가 그려진 활을 가지고, 넨젠아시게(連銭葦毛)라는 명마에, 킨부쿠린(金覆輪)의 안장을 찬 무사


 이화려한 무장을 쫓은 나오자네는 그를 덜어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치려고 투구를 벗겨보자, 나오자네는 깜짝놀랍니다. 엷게 하얀 화장을 한 16~17밖에 되보이지 않는 미소년이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 순간 숨을 삼킨 그는 어디를 베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자신의 아들이 생각나 베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기품있게 '저를 베십시오.'라고 해 나오자네는 더욱더 그를 베지 못하고 돌려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그때 미나모토의 군세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아군의 군세가 보는 앞에서는 그를 놓쳐 줄 수 없습니다. 결국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른 사람에 욕보이지 않게 해주겟다'며 그를 벱니다.


 한참을 흐느끼던 그는 그 젊은 무사의 목을 싸려고 기모노를 벗습니다. 그러, 그 젊은 무사의 허리 금봉투에 쌓인 피리를 발견했습니다. 나오자네는 문득 어제 밤의 일을 생각해 냅니다. 어제 밤 결전을 앞두고, 불온한 공기에 싸이고 있던 이 이치노타니 일대에 그 때, 어디서인지 모르게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밤하늘에 퍼지는 그 피리 소리는 거기가 전장인 일을 잊게 해 미나모토나 타이라도 관계없이 잠시 눈을 붙이게 합니다. 



아오바의 피리



"어젯밤의 피리 소리는 이 사람의 것이었는가. 동국에서 달려온 몇만 대군고 전쟁에 피리를 가지고 온 자는 없었다. 아무도 풍류를 모르고 적을 죽일 생각밖에 못했던 것이다."


 전쟁과 무사의 허무함을 알게된 나오자네는 그 이후 불가에 입문했습니다. 이 젊은 무사는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동생 츠네모리(経盛)의 아들 타이라노 아츠모리였습니다. 

  1. 연두빛 실로 철조각을 이어만든 갑옷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