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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고덴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닛타 요시사다의 덴노군, 교토 탈환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닛타 요시사다의 덴노군, 교토 탈환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1월 27일, 미이데라(三井寺)에 주둔하고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군을 닛타 요시사다가 이끄는 고다이고덴노군이 공격해 덴노군이 교토를 탈환했습니다. 제96대 고다이고덴노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등의 아군을 얻어 가마쿠라 막부를 넘어뜨려 시작된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 그러나 공적이 있던 무사 들을 등한시해 문신을 우선한 개혁은 무사들의 큰 불만을 야기했습니다. 이에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나카센다이의 난을 토벌한 뒤에(나카센다이의 난) 가마쿠라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고다이고덴노의 군세를 이끌고 아시카가 타카우지 토벌에 나섭니다.(닛타 요시사다 출진) 하지만 ..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참전;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타카우지 참전;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 겐무 2년(1335년) 12월 11일, 고다이고덴노의 명령으로, 토벌에 향한 닛타 요시사다를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토벌한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箱根・竹ノ下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이 카테고리는 남북조의 동란입니다만, 그 동안은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겐무의 신정을 행하는 고다이고덴노와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대립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투로 표면화되어 곧 타카우지의 북조와 고다이고덴노의 남조로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남북조의 쟁란의 계기가 되는 것이 오늘의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입니다. 모반의 소문이 흐르는 아시카가 타카우지 토벌을 위해 출진한 닛타 요시사다지만, 정작 타카우지는 '수하 무사들을 도우려 했을 뿐 덴노에게..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다카우지,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다카우지,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다 겐무2년(1335년) 8월 19일, 지난 달에 발발한 나카센다이의 란의 주력이던 스와 요리시게등이 할복 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난이 진압되었습니다. 겐무2년(1335년) 7월 23일에 반란군이 가마쿠라를 점거한 나카센다이의 난(나카센다이의 난)에서 사실상 호조 가문의 마지막 쇼군인 호조 다카토키의 어린 아들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는 스와 요리시게 등의 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 가마쿠라를 점령했고, 이에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동생 나오요시와 황태자 나루요시 친왕(成良親王), 어린 타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를 데려 가마쿠라에서 탈출해 스루가로 향합니다. 탈출한 나요요시의 통지에 의해..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모리요시 친왕, 암살당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모리요시 친왕, 암살당하다 겐무2년(1335년) 7월 23일, 가마쿠라에 유폐중이던 모리요시 친왕을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남동생 나오요시(直義)가 암살했습니다. 오오토우노미야 모리요시 친왕(大搭宮護良親王)은 겐무의 신정의 제 96대 고다이덴노의 황태자입니다. 처음은 히에이잔렌라쿠지에서 승려가 되어 출가한 뒤 소운법 친왕(尊雲法親王)이라 자칭하고 텐다이자스(天台座主)가 되어 있었습니다만, 아버지 고다이고덴노가 타도 가마쿠라 막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환속해 참전합니다. 그는 킨키 지방의 무사를 모아, 가마쿠라막부에 주목받아 자유로이 행동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함께 싸우자!'라고 영지를 연발해,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고다이고덴노에게 협력..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나카센다이의 난 발발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나카센다이의 난 발발 겐무 2년(1335년) 7월 23일, 죽은 호조 다카토키의 아이 타카유키를 필두로 가마쿠라막부 부흥을 목표로 한 반란인 나카센다이의 란으로, 반란군이 가마쿠라를 점거했습니다. 막부군은 전면 항복했습니다만, 마음 속에 '막부 부활'의 뜻을 숨기는 사람이나, 간신히 소수로 탈출해 반란을 획책 하는 사람들은 남아있었습니다. 호조 다카토키에게는 3명의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카토키의 유우시(猶子)로 종가에 들어가 있던 하루토키(治時)는 7월 9일에 처형됩니다 친자인 장남 쿠니토키(邦時)는, 아버지에게서 '호조 재흥'의 꿈을 맡아 백부인 고다이 이인노 무네시게(五大院宗繁)에 맡겨집니다만, 그가 스스로의 보신을 위해서 쿠니코키를 팔았기 때문에 포박 되어 5월 28일..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막부군의 항복으로 아소 하루토키 등이 처형당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막부군의 항복으로 아소 하루토키 등이 처형당하다 겐코 3년(1333년) 7월 9일, 아소 하루토키(阿蘇治時), 오사라기 타카나오(大仏高直) 등 호조의 유명한 가신이나 중신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호조 다카토키 일족 멸망의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일련의 겐무의 신정이 개시됩니다. 가마쿠라막부 정권에서 그 세력을 자랑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일족은 이슬과 함께 사라졌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는 즉시 호키 센죠우산(船上山)을 출발해,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그는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로쿠하라탄다이가 함락된 시점에서, 코우곤덴노(光厳天皇)를 내쫓아, 사실상 정권을 탈취..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고다이고덴노의 겐무의 신정 시작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고다이고덴노의 겐무의 신정 시작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호조 다카토키 일족 멸망의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일련의 겐무의 신정이 개시됩니다. 가마쿠라막부 정권에서 그 세력을 자랑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의 일족은 이슬과 함께 사라졌습니다.이 소식을 들은 고다이고덴노는 즉시 호키 센죠우산(船上山)을 출발해,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6월 6일 그는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로쿠하라탄다이가 함락된 시점에서, 코우곤덴노(光厳天皇)를 내쫓아, 사실상 정권을 탈취하고 있던 고다이고덴노는 조속히 논공행상을 함과 동시에, 원정(院政)도, 섭관 정치(摂関政治)도, 막부도 부정한 '겐무의 신정'을 개시합니다. 우선은, 개점휴업..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타카우지 입경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아시카가 타카우지 입경하다 겐코 3년(1333년) 4월 16일, 다시 막부에 반기를 든 고다이고덴노를 토벌 하기 위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高氏)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에서 연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도, 합의제 아래 요리토모 계열의 쇼군은 불과 3대로 끊어져, 그 다음은 이름뿐인 쇼군을 공가들이 임명해, 실질적으로는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의 친가인 호조 가문이 집권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쇼와(正和) 5년(1316년), 제14대 쇼군으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취임합니다. 그런데, 그 2년 뒤에 제96대 덴노로 즉위 한 고다이고덴노는 현 정권에 불만을 가져, 덴노의 친정을 목표로 해 은밀하게 획책합니다. 이윽고..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막부 대 마사시게, 치하야성 공방전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막부 대 마사시게, 치하야성 공방전 겐코 3년(1333년) 윤 2월 5일,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농성하는 치하야성(千早城)에, 가마쿠라 막부군이 쳐들어갔습니다. 치하야성(千早城)은 콘코산(金剛山) 안에 있어, 3면을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충지였지만, 둘레는 4 km 정도의 작은 산성으로 지키는 군사도 불과 1000명 인데다 대부분 승병이었습니다. 거기에, 막부의 군세 20만이 쳐들어옵니다. 겐코 3년(1333년) 윤 2월 5일, 드디어 막부군은 공격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우위에 막부군은 제대로 작전을 세우지 않고 공격합니다. 이에 지장 마사시게는 게릴라 전법을 펼쳐 막부군에게 큰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자 막부군은 충격에 포위로 작전을 변경해 수원을 끊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