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임진왜란 서막의 불협화음, 우메키타의 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임진왜란 서막의 불협화음, 우메키타의 란
분로쿠 원년(1592년) 6월 15일, 사츠마 유노오(湯之尾)의 지도우(地頭)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가 사시키성(佐敷城)을 습격해 빼앗았습니다. 우메키타의 란, 혹은 우메키타 잇키로 불리는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반란입니다.
먼저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쵸의 역 이라고 부른는 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중에 연표에 사건만 표시하고 지나가고, 기회가 된다면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임진왜란 기간에 일본에 있었던 사건 위주로 서술하려 합니다.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国兼)
분로쿠 원년(1592년) 4월 13일,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히젠 나고야성(名護屋城)에 거점을 두고, 차례 차례로 제2군, 제3군이 조선 침략으로 향했습니다.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도 임진왜란에 출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시마즈의 가신으로, 유노오의 지도우였던 우메키타 쿠니카네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최전선의 기지인 나고야성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는 '후네마치(船待ち: 배 대기)'를 하며 사시키성벽 아래에 있던 쿠니카네의 군대는 6월 15일, 틈을 보아 약 300의 장병을 인솔해 사시키성을 포위했습니다. 이 때, 쿠니카네는 이미 주변 영지에 있는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반란군의 수는 700~2,000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습니다.
사시키성은 큐슈 정벌(큐슈정벌) 때에 끝까지 싸운 시마즈를 경계하기 위해서, 히데요시가 신뢰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에게 만들게 한 요충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주인 기요마사나, 성주 대리를 맡고 있던 가토 시게츠구(加藤重次)는 조선을 침략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을 맡고 있던 것은 야스다 야소우(安田弥蔵), 사카이 젠자에몬(境善左衛門), 이노우에 히코자에몬(井上彦左衛門), 이노우에 야이치로우(井上弥一郎)등과 몇 안되는 성병이었습니다.
사사키성의 위치
큰 병력차이에, 대응조차 못하고, 거의 무저항으로 성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3일 후인 6월 17일, 야스다 야소우 등은 주연의 자리를 마련해 쿠니카네등 반란세력을 초대합니다. 이미 항복이 결정되어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쿠니카네등이 권유받는 대로 술을 마시자, 젠자에몬이 쿠니카네를 베어 버리고, 계속해 야소우도 적을 벱니다. 이렇게 해 그대로 사시키성을 탈환해, 란은 불과 3일에 종결했습니다.
하지만 이 란으로 인해, 이미 지연되었던 시마즈의 한국 출병이 한층 더 늦어지는 일이 되어, 요시히로 자신이 '일본 제일의 늦은군대(日本一の遅陣)'라는 오명을 쓰게 되어,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그 후의 시마즈의 입장을 나쁘게 해 버렸습니다. 3일 만에 진압되어 별것 아닌것 같지만, 한편에서는 란이 15일간에 걸쳐 행해졌다고 하는 설도 있고, 그 전후 처리의 내용을 보아도, 꽤 중요한 사건이었던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란자가 신으로 모셔지다니?
히데요시가 '아쿠쟈쿠진(悪逆人)'이라고 부른 주모자 쿠니카네와 그 동료는 목이 나고야성의 해변에서 효수되고, 쿠니카네가 인솔한 300명중에 시마즈 토시히사(島津歳久)의 가신이 대부분 있었다고 해, 그는 7월 18일에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할복 자살하려고 하지만, 몸이 부자유스러웠기 때문에 파면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소신궁의 구우지(宮司: 우두머리 신관)이었던 아소 고레미쯔(阿蘇惟光)는 구마모토 하나오카산에서 참수 되었습니다. 쿠니카네의 영지인 야마다군(山田郷)에 란의 실패를 고하러 간 중신 7명도 스스로 할복하고, 그 후 잡힌 쿠니카네의 아내는 나고야성으로 보내져 화형의 형에 처해집니다. 난의 주모자 중 쿠니카네의 아들만이 행방이 묘연해 생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영지였던 곳에는, '우메키타 신사'가 존재합니다. 왠지모르게, 현지에서는 쿠니카네를 신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신사를 살펴보면 이미 에도시대 초의 무렵에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단순한 반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의 천하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애초에 지역색이 강한 큐슈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계기로 최전선에 서게 되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아마 이 란은 시마즈의 임진왜란을 반대하는 운동이었던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