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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가의 난(2) 사가의 난 발발, 에토 신페이의 최후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가의 난(2) 사가의 난 발발, 에토 신페이의 최후 메이지7년(1874년) 2월 16일, 메이지 유신 후의 첫 사족의 반란인 사가의 난으로, 불평 사족들이 사가성에의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목숨을 걸어 에도막부 말기의 보신 전쟁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부의 방침은 무사의 특권을 빼앗는 '시민 평등'이었습니다. 실직한 사족들의 불만은 서서히 커져 갔습니다. 이윽고, 메이지7년(1874년) 1월 14일 도쿄에서 정부 고관인 이와쿠라 토모미가 토사의 사족에 습격당하는 아카사카 쿠이치가이의 변이 발발해, 게다가 2월 3일에는 사가에서 역시 불만을 가진 사족 그룹이 정상 오노조에 밀어닥쳐 돈을 강탈하는 사건이 발발해 중앙정부에서 쫓겨난 사가 출신 에토 신페이가 정확히 이 타이밍에 고향..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가의 난(1) 사가의 난의 전초, 우국당 자금 강탈사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가의 난(1) 사가의 난의 전초, 우국당 자금 강탈사건 메이지 7년(1874년) 2월 3일, 사가의 우국당이 오노조에게서 자금을 강탈했습니다. 정한론의 논쟁에 패배해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계를 떠난 메이지6년의 정변은 뒤에 세이난 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가고시마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만, 동시에 사가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나 이타가키 타이스케와 함께 사가 출신인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나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도 동시에 정계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사가는 메이지 신정부의 방침에 의해 막부에서 주던 녹도 없어지고, 폐도령에 의해 칼도 빼앗긴 사무라이들의 불평 불만이 모여 몇 개의 단체가 결성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정한론 논쟁, 메이지 6년의 정변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정한론 논쟁, 메이지 6년의 정변 메이지6년(1873년) 10월 24일 메이지 정부 내에서 정한론 논쟁이 일어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참의직을 사직했습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6년의 정변이 발발한 것입니다. 연호도 메이지가 되어 수도의 이름도 에도에서 도쿄로 바꾸었습다. 도쿠가와 막부에 진저리 나고 있던 사람들은 유신에 많이 기대했습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문도 일어났고 마을과 마을은 철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반으로 한다고 약속하고 있던 세금은 반대로 이전의 배가 되어 버렸고, 일부 사람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비해, 서민의 생활은 이전과 다르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었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