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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재개, 타타리하마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재개, 타타리하마 전투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3월 2일, 교토에서 쫓겨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치쿠젠 타타라하마(多々良浜)에서 키쿠치 타케토시(菊池武敏)를 물리치고 재기했습니다.


 함께 가마쿠라막부를 무너뜨렸지만(가마쿠라막부 멸망), 고다이고덴가 연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하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호조 잔당 토벌을 위해서 가마쿠라에 머문 채로 교토에는 돌아오지 않고, 반대로 고다이고덴노에게서 파견된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로(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 닛타군을 추격 하면서 교토로 쳐들어갔습니다. 도중에 참전한 토호쿠의 무사들을 가세해 80만이라는 대군이 되어 교토로 쳐들어가는 아시카가군에 대해, 고다이고덴노는 히에이잔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여기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군이 더해져, 토호쿠에서 달려 든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도 덴노측 합류합니다. 이에 기세를 몰아 겐무 3년(1336년) 1월 27일 덴노군은 교토를 탈환했습니다.(교토 탈환)



타타리하마 전투



 덴노군은 서쪽으로 철퇴하는 아시카가군을 쫓아, 2월 6일에는 토시마가와(豊島河) 강에서 전투를 전개합니다. 열세이면서도, 어떻게든 위기를 벗어난 아시카가군은 효고에 철퇴합니다. 한층 더 뒤쫓으려고 하던 요시사다였지만, 이때 양자의 수군이 가세 하기 시작합니다. 덴노측에는 도이(土居), 토쿠노우(徳能)의 수군이, 아시카가측에는 오오토모(大友), 고토(厚東), 오오우치(大内)의 수군이 가세했습니다. 이렇게 해 전투는 한층 더 심해질뻔 했습니다. 하지만, 타카우지에 가세한 오오토모 사다무네(大友貞宗)가 계속 패배를 하던 타카우지에게 큐슈로의 퇴각을 전언합니다. 이를 받아들인 타카우지는 큐슈의 쇼니 사다츠나(少弐貞経)등과 합류하기 위해 오오토모의 군선을 타고 큐슈로 향합니다.  


  타카우지가 떠난 교토에 닛타 요시사다와 고다이고덴노는 당당히 개선했습니다. 입경한 고다이고덴노는 겐무라는 연호는 재수가 없다며 연호를 '엔겐'으로 바꾸게 됩니다. 한편, 큐슈로 향한 그는 치쿠젠 타타리하마의 항구에 상륙합니다. 이때 그를 따르는 장병은 단 500명이었습니다. 조속히 쇼니 사다츠나와 합류하려는 그에게 히고에서 타카우지 상륙의 소식을 들은 키쿠치 타케토시는 바로 사다츠나가 있는 타자이부(大宰府)[각주:1]를 공격합니다. 아직 준비를 채 하지못했던 사다츠나는 할복하고 맙니다. 이 여세를 몰아 타카우지를 토벌하러 향한 그의 군세는 2만여기, 반면 타카우지가 이끄는 군세는 2,000여기에 불과합니다.



타타리하마 전투 위치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3월 2일, 치쿠젠 타타라하마에서 전투가 시작됩니다. 당연히 군세가 많은 키쿠치군이 우승할 줄 알 줄 알았지만, 전략에 뛰어난 아시카가군은 적을 농락했습니다. 큐슈의 세력은 대부분 덴노가 우세해 그쪽에 참가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겐무의 신정은 어디까지나 무사에게 불리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전략에 뛰어난 아시카가군을 본 그들은 아시카가군에 서기로 결심합니다. 타카우지는 이것을 예측하고, 큐슈의 여러 장군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이 작전은 대성공해 여러 배신자가 나왔기에, 키쿠치군은 패배해 깊은 산속으로 도망칩니다.


 한편, 아시카가 타카우지 추토의 칙명을 받고 서쪽으로 향한 닛타 요시사다는 하리마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아시카가측의 한 명으로서 서고 있던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는 닛타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하리마수호직을 준다면 덴노에게 붙겠다며 시간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1. 리츠료우세아(律令制) 하에서 큐슈, 이키 그리고 쓰시마의 외교를 관할하던 관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