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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닛타 요시사다, 타카우지 토벌군으로 출진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닛타 요시사다, 타카우지 토벌군으로 출진



 겐무2년(1335년) 11월 19일, 아시카가 타카우지 토벌 명령을 받은 닛타 요시사다가 교토에서 출진 했습니다.



닛타 요시사다



 겐코 3년(1333년) 5월 길게 정권을 잡고 있던 호조 가문의 제14대 쇼군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와 가마쿠라막부를 끝내 겐무의 신정을 개시 한 고다이고덴노였지만,(겐무의 신정) 그 신정은 귀족이나 문신에 치우쳐져 있어, 실제로 막부를 토벌한 공로가 있던 무사에게는 은상이 적어 양자의 갈등은 깊어집니다. 이런 가운데 죽은 다카토키의 유아인 호조 토키유키를 옹립해 스와 요리시게가 호조 복권을 위해 나카센다이의 란을 일으켰습니다.(나카센다이의 란) 이를 진압하러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움직이게 됩니다만, 조건으로 '정이대장군(쇼군)과 은상 수여권을 요구했습니다. 은상 수여권을 제한적으로 허락받은 타카우지는 난을 진압하고 독단적으로 은상을 분배하게 됩니다. 이에 '타카우지가 반란을 일으켰다'라는 소문도 흐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닛타 요시사다의 영지도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부하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에 흥분한 그는 타카우지 토벌을 요청하고, 반대로 타카우지는 요시사다 토벌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고다이고덴노는 평정을 열고, 이 자리에서 발안한 것이 보우몬노 사이쇼우 키요타다(坊門宰相清忠)였습니다.


 "지금 양쪽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고, 곰곰히 도리를 생각해 보건데 요시사다가 주장하는 타카우지의 8개 죄는 모두 중죄였습니다. 특히, 다이토노미야(大塔宮)[각주:1]를 살해한 건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의 의견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세간에 흐르는 소문의 진위를 판별하고 나서 판단을 내리심이 옳을듯 합니다."


 이날의 평정은 종료했습니다만, 이때 가마쿠라에서 다이토노미야의 신변을 돌보고 있었던 미나미노온가타(南御方)가 상경해 모리요시친왕 암살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모리요시친왕 암살) 이에 덴노와 조정은 동요합니다. 게다가 타카우지가 큐슈나 시고쿠에 원군을 요청한 사실 또한 발각되어 타카우지의 모반이 확실해 져 토벌군이 파견되게 되었습니다.



츌진하는 요시사다



 조속히, 고다이고덴노의 황태자 이치노미야(一宮)[각주:2]를 관동 관령으로, 닛타 요시사다를 대장군으로 한 타카우지 토벌군이 편성되어 겐무2년(1335년) 11월 19일, 6만 7,000여기의 군세가 교토를 출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된 아시카가 측은 '고다이고덴노에게 대항할 생각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은 어디까지나 부하 무사들의 무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일련의 행동을 행한 것이며 덴노에게 모반할 생각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무실을 주장하기 위해 출가해 버립니다.


 부득이 남동생안 나오요시가 군사를 인솔해 닛타로 향하기 위해, 11월 20일에 가마쿠라를 출진합니다. 곧, 미카와 야하기가와(矢矧川)에서 양자는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사다와 그 동생 와기야 요시스케(脇屋義助)의 도하 유도 작전에 걸려, 아시카가군은 철퇴합니다. 계속 되어, 사기자카(鷺坂)에서도 패배해 테고시(手越)에서는 야습에 패주해  닛타군은 이즈를 수중에 넣어 드디어 가마쿠라로 향합니다. 가마쿠라에 도망간 나오요시는 막 출가하려는 형에게 일세일대의 거짓말을 해 참전하게 합니다. 

  1. 모리요시 친왕 [본문으로]
  2. 타카나가 친왕(尊良親王)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