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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다카우지,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다카우지,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다



 겐무2년(1335년) 8월 19일, 지난 달에 발발한 나카센다이의 란의 주력이던 스와 요리시게등이 할복 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난이 진압되었습니다.


 겐무2년(1335년) 7월 23일에 반란군이 가마쿠라를 점거한 나카센다이의 난(나카센다이의 난)에서 사실상 호조 가문의 마지막 쇼군인 호조 다카토키의 어린 아들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는 스와 요리시게 등의 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반란군은 기세를 몰아 가마쿠라를 점령했고, 이에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동생 나오요시와 황태자 나루요시 친왕(成良親王), 어린 타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를 데려 가마쿠라에서 탈출해 스루가로 향합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



 탈출한 나요요시의 통지에 의해, 반란을 안 교토에서는, 조속히 타카우지를 정벌로 향하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후 고다이고덴노의 명령을 받은 타카우지는 그것에 대해 두 개의 교환 조건을 제시합니다.


"겐코의 변(겐코의 변때 에, 제가 원군으로서 더해졌기에, 전국에서 군사가 일어나 막부 토벌에 참가해, 단번에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요. 원래 정이 대장군(쇼군)의 지위는 미나모토와 타이라 가문의 무장이 그 공적에 의해 임명되는 자리 입니다. 세상이 혼잡한 때 일수록, 우리는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향후의 조정을 위해서라도 저를 정이 대장군에 임명해 주십시오. 


 또한 앞으로 일어날 반란을 미리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공적이 있는 무장에게 은상을 주어야 합니다. 이로 사기를 높이고, 충성심을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같이 다양한 조건과 절차 뒤에 은상을 받게 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저에게 포상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이것을 행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나서 가마쿠라의 역도들을 정벌하겠습니다."


 겐무의 신정은 덴노의 친정이었습니다. 덴노의 허가 없이는 작은 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을 걸어 싸운 무사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타카우지의 말은 이런 무사세력의 불만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야할지 말지에 대해 많은 회의를 거쳐 관동 8개국의 관리와 지배권을 주는 대신에, 정이 대장군 건은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즉, 뒤의 조건을 부분적으로 허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란군 토벌의 공적을 봐서 정이 대장군에 임명하기로 합니다. 고다이고덴노는 스스로의 이름인 타카하루(尊治)의 한 글자인 '타카(尊)'를 주어주기로 합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이 타카우지(高氏)에서 타카우지(尊氏)로 바뀐 것입니다.


 이에 부득이 출진을 결의한 타카우지는 도중에, 나오요시등과 합류해 5만여기로 가마쿠라로 진군 합니다. 물론, 이것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반란군도 3만여기를 이끌고 가마쿠라를 출발합니다. 도토미, 하시모토나 사가미, 사가미가와등에서 연전 연패해, 부득이 가마쿠라에 퇴각한 반란군은 겐무2년(1335년) 8월 19일에는, 불과 300기가 되어 스와 요시시게 이하, 지휘관들이 전원 할복 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특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가죽을 벗겨 버렸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죽었는자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북조의 동란에서 스와 요시시게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신속하게 관동을 지배한 타카우지는 무장들에게 스스로의 판단으로 포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매우 독단적으로 진행되어서 고다이고덴노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가마쿠라에 들어가 교토로 돌아오라는 덴노의 요청을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가마쿠라에서 무가 정권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이에 '아시카가 타카우지 반란'의 소문이 흐르게 됩니다. 여기다 모리요시 친왕을 타카우지의 동생인 나오요시가 살해한 일이 문제가 됩니다.(모리요시 친왕 암살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