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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전쟁편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 (1)무장들의 군신신앙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를 이끈 사상과 신앙

(1)무장들의 군신신앙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의 가훈 「조운사전입한개조(早雲寺殿廿一箇条)」의 제 일조는 '제 일, 불신을 믿어 따를 것'입니다. 이세 모리토키는 신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모리토키는 이즈 미시마다이묘진(三島大明神)에 일정 기간 머물며 기도한 뒤에 정월에 큰 2 개의 삼(杉)을 한마리의 쥐가 먹고, 범으로 변화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태어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扇内上杉)가를 멸망시킬 것을 예견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이세 모리토키가 바로, 호조 소운입니다.



미시마다이묘진(三島大明神)



 모리가의 군기에는 「頂礼正八幡大菩薩 南無九万八千軍神 二千八百四天童子十 帰命摩利支尊天王」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치만대보살을 머리를 조아려 공경하고, 나무 구만팔천 군신, 이천팔백사 천동자, 마니 지존천왕의 가르침에 따름' 이라는 뜻이지요.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는 아들인 모토나가 에게 보낸 살생의 죄가 극심하기 때문에 뉘우침을 위해 사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모리 군기의 윗부분


 우에스기 겐신은 엣츄 평정의 성공과 그 사이의 영지의 안전을 빌기 위해 겐키 원년 경문을 간킨죠(看経所)에 봉납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여러 군신에게 성공을 빌고 있었습니다. 투구 안에 엄지 크기의 불상을 넣거나 불상이 들어간 두개의 문짝이 달린 궤를 짊어져 싸우는 무장이 있었습니다. 이런 불상을 진불(陣仏)이라고 합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전장에 비사문천상을 가져 갔었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진불은 '흙투성이 비사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정도 크기의 불상을 투구에 넣었습니다. 비사문천입니다.



 다케다 신겐은 '나무추호남궁법성상하대명신(南無諏方南宮法性上下大明神)', '추호남궁산하대명신(諏方南宮上下大明神)'이 적힌 기를 이용하는 등 스와묘진(諏訪明神)을 신앙하고 있었습니다. 혜하야시지(恵林寺)에는 신겐과 등신대로 제작된 부동명왕상이 있는데 신겐은 가슴털을 잘라 옻나무로 이 불상에 붙였다고 합니다. 에이로쿠 원년 8월, 토우가쿠지 대권현신전에 기원문을 봉납하며 시나노가 손에 들어 올지, 우에스기 겐신과의 화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점쳐, 그 결과를 보고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문제의 부동명왕상



 오오우치는 묘겐지(妙見社)를 믿었습니다. 묘겐 보살은 북극성으로 여겨져 신수는 현무였지요. 그렇기에  쵸우코우 원년, 오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는 자라, 거북이, 뱀을 매의 먹이로 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 묘겐 보살은 거북이를 탄 아이의 모습의 보살로 여겨져 오오우치가는 마사히로, 요시오키(義興), 요시타카(義隆)의 어릴 때의 이름은 기도마루(亀童丸)로 지었습니다.



묘겐지(妙見社) 전경



 이렇듯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제각기 다른 신들을 신앙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겐신만이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데, 다른 무장들도 그에 지지 않을 정도였지요. 남도, 자식도 아내조차도 믿을 수 없는 전국시대에 믿을 것은 신 뿐이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