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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주에이 2년(1183년) 5월 9일, 호쿠리쿠에 쳐들어온 타이라 군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 군의 선발대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의 군세가 한야노에서 격돌한 '한야노 전투'가 있었습니다.



한야노 전투 사적지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기 때문에 앞의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타이라 측으로 배신한 에치젠 헤이센지의쵸우리 사이메이(長吏斎明)의 안내로 진군해 나갑니다.


 그는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언합니다.  '엣츄와 에치고의 경계에 간바루(寒原)라고 하는 험한 곳이 있습니다. 지금 에치고에 있는 요시나카가 만약 엣츄를 넘어 여기에 들어오면 뒤에 귀찮게 되므로, 먼저 간바루에 군사를 파견해 엣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이쪽 지형을 잘 모르는 코레모리는 그 진언을 받아 들여 조속히엣츄 젠지 세이슌(越中前司盛峻)에게 5천의 군사를 붙여 엣츄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토나미(砺波)를 넘어 코야베가와(小矢部川)까지 온 세이슌이 본 것은, 전방의 구레하산(呉羽山)에는 이미 키소의 백기가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선발대인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는 에치고에서 오야시라즈(親不知), 진즈가와(神通川)를 질풍과 같이 앞질러가 이미 에츠젠, 카가의 패잔병과 합류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득이 세이슌 구레하산의 기슭인 한야노에 진을 칩니다. 이윽고, 주에이 2년(1183년) 5월 9일의 오전 6시 카네히라의 군이 노도와 같이 구레하산을 내려와 한야노에 밀려 들어 '한야노 전투'가 개막했습니다.



구리가타토우케 전황도



 전군이 일제가 돌격하지는 않고, 서로 2~300기 씩을 내보내 싸웠지만 난전은 오후 2 시경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일진일퇴의 전황이었지만 저녁무렵에 타이라군은 2천 남짓의 부상자를 내고, 코야베가와 강변까지 철퇴를 하게 됩니다. 결국 남은 3천기가 채 되지 않는 군사는 다시 토나미산을 넘고, 카가의 본대로 도망갔습니다. 한야노에서의 패배를 알게 된 코레모리는 다음의 전투에는, 전군으로 대응하는 것을 결정해 10만의 대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진군을 시작합니다. 총대장 타이라노 코레모리 자신이 인솔하는 본대 7만의 군사는 카가와 엣츄의 국경 토나미산을 목표로 합니다. 그리고 타이라노 미치모리(平通盛)가 인솔하는 3만의 군은 북측을 우회 해서 노토에 들어가 역시 카가와 엣츄의 국경에 있는 시라오산(白雄山)을 목표로 합니다. 이 때, 타이라의 적기는 10만 부대를 알리는 듯이 산을 붉게 물들여 마치 단풍이 든 듯 했습니다.


 한편 그 무렵의 요시나카는 에치고에서 진군하는 도중에 군사를 모으며 엣츄에 들어와, 어떻게든 5만 정도의 군사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타이라의 대군이 두 부대로 나뉘어본대는 토나미산을 향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됩니다. 나미산을 넘고 토나미 평야에 들어가지면 넓은 장소에서의 전투가 되어, 수가 적은 요시나카는 불리하게 됩니다. 타이라군이 토나미산에서 내려온다면 필패입니다. 그는 토나미산을 하산하려면 지나야 하는 히노미야 숲(日宮林)에 진을 쳐 미나모토의 백기를 휘날립니다. 이 긴장은 팽팽해져 마치 당겨진 활시위같아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