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에이로쿠 11년(1568년) 스루가에 진공하려고 하는 다케다 신겐과 그것을 맞아 싸우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격돌한 '삿타토우케 전투(薩埵峠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이마가와 우지자네 초상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오케하자마 전투)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목숨을 잃은 후, 뒤를 이은 것이 장남 우지자네(氏真)입니다. 그러나 동해도 제일궁 요시모토의 후계자 자리는 그에게는 너무 과중했던것 같습니다. 가신단의 마음은 주군에게서 떠나 이마가와가는 순식간에 쇠퇴해갔습니다. 우지자네의 어머니가 다케다 신겐의 여동생(죠우케이인)이였기 때문에 당분간은 손을 대지 않았던 신겐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키요스 동맹을 파기해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고 이마가와의 영지에 쳐들어가 스루가를 신겐이, 도토미를 이에야스가 통치하기로 협의합니다. 이 이마가와와의 동맹 파기에 반대한 것이 신겐의 장남 요시노부입니다.(요시노부의 할복)
장남이 할복을 하는 상황에 미루면서까지 이미가와의 스루가로 진군하는 신겐의 속마음에는 엄청난 각오가 있었겠지요. 에이로쿠 11년(1568년) 드디어 신겐은 스루가로 진군합니다. 동시에 이에야스는 도토미로 군사를 진군시킵니다. 신겐은 이윽고 우치보(内房)에 도달합니다. 물론, 신겐의 스루가 침입을 안 우지자네는 즉석에서, 중신인 이하라아 아노카미(庵原安房守)나 오구라 카츠히사(小倉勝久)들을 삿타토우케(薩埵峠)에 파견합니다. 이 삿타토우케는 가이에서 스루가로 침략할 때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따라서 우지자네는 이곳을 어떻게든지 지키려고 했지요. 우지자네는 한층 더 원군을 늘리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 근처에 키요미지(清見寺)에 포진 합니다. 이마가와군은 1만 5천이라고 하는 대군을 주둔시켜 삿타토우케 수호의 의지를 나타냈지요.
당시 전황도
에이로쿠 11년(1568년)의 말, 삿타토우케 전투의 포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포진 하고 있던 아사히나 노부오키(朝比奈信置)등의 복수의 중신이 개전 직전에 급히 진을 거두고 스루가에 돌아가 버렸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말을 신조로 삼은 신겐은 스루가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마가와측의 여러 가신들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마가와의 우지자네와 가신들의 사이에 균열이 있던것을 보기 좋게 이용한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안 나머지 이마가와의 가신들도 당연히 사기는 내려가 차례차례 전선을 이탈해 갔습니다. 결국 우지자네는 퇴각하게 되고, 신겐은 피를 흘리지 않고 요충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마가와의 본거지 이마가와관 공방전이 치뤄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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